아프리카에서 쓴 편지

아프리카에서 쓴 편지
세스림사막, 나미비아

하현아 안녕 여기는 나미비아 스와코프문트라는 지역이야. 날짜는 2월 9일, 한국은 지금 오전 7시겠구나. 이번 여행에서도 일기나 감정들을 기록하려고 지난 시베리아 횡단열차 때 챙겼던 노트를 또 가져왔어. 물론 노트가 캐리어에서 너무 고생해서 그런지 쭈굴쭈굴해지고 난리 났지만... 그래서 감성 있으니까!

지금은 총 20일 여행 중에서 10일 - 11일 차 넘어가는, 딱 중반 지점이야. 근 며칠간 계속 사막 가고 캠핑하고 하느라 고생을 좀 했거든. 그런데 오늘은 숙소가 너무 좋아. 방금 씻고 밀린 손빨래도 하고 피부 관리, 머릿결 관리 다 끝내고 나서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어. 매우 기분이 좋다는 뜻이야. 심지어 인터넷도 된다구

그런데 바보같이 잉크를 거의 다 쓴 검은 펜을 가져왔어... 어쩐지 순조롭다 했네. 다행히 다른 색은 멀쩡하게 가져왔으니 이걸로 쓸게. 일단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멤버 구성으로 아프리카에 왔는지, 잘 살아남고 있는지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해.

(중략)

사실 걱정도 많이 됐었는데 여행 전의 나는 아프리카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설레고 기대되고, 다시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막연한 불안감을 모두 무시하고 비행기에 올라 버린 거야. 비행은 정말 쉽지 않았어. 13시간을 타고 한 시간 경유해서 7시간을 더 비행해야 했거든. 에티오피아 항공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좌석 간격이 좁던지. 도착하니까 발이랑 다리가 퉁퉁 부었더라.

물리적인 불편함은 생각보다 정말 없어. 숙소가 캠핑할 때 빼고는 거의 다 에어비앤비인데 땅덩어리가 넓어서 그런지 항상 가격 대비 시설이 좋거든. 캠핑장도 샤워시설 남녀 따로 잘 갖춰져 있어서 진짜 괜찮아. 또 서로 선도 잘 지키고 굳이 불필요한 배려도 안 하고 있어서 아주 살만해. 뭐 식비가 항상 1.5배가 나오는 것 정도가 불편함이야. 대신 나는 술을 1.5배로 마시는 것 같아서 이것도 딱히 불만은 없어. 다만 정말 아쉬운 건 행복을 나눌 사람이 필요해. 딱히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좋은 곳, 예쁜 곳을 보면 '너무 예쁘다, 좋다, 행복하다' 표현하면서 더 즐거워하고 서로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데 그게 좀 안돼. 혼자 여행도 잘 다니고 나는 외로움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충분히 주변 사람들과 충만한 감정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결론은 보고 싶다고. 많이!

그래도 이건 정말 사소한 아쉬움이고, 전반적으로는 아주 행복해. 매일매일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분에 차고 넘치게 볼 수 있어. 사실은 살면서 행복한 순간이 굉장히 많은데, 다 놓치고 스쳐 지나가는걸. 여행에서는 '아 행복하다'라고 말로 뱉을 수 있는 거야. 막연한 감정이 언어화를 거치면 더 선명해지니까. 행복하다 한마디를 뱉고 나면, 정말 정말 행복해지거든.

내일은 이틀 연속 캠핑이야. 동물들이 아주 많은 국립 공원에서 셀프 사파리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어. 그동안 길에서 타조, 펭귄, 플라멩코, 오릭스 등등 엄청 많이 봤는데 이제는 진짜 아프리카 야생동물들을 보러 가는 거야. 개인적으로 코뿔소가 가장 보고 싶어.

쓰다 보니까 한 시간 가까이 되었고, 새벽 한시가 넘었네. 오늘은 이만 줄일게.

추신 1. 근데 우리 왜 여행 간 적이 없는 거 같지? 어디 동해 쪽 예쁜 책방 투어 이런 거라도 한 번 다녀오자.

추신 2. 그리고 나 귀국하면 같이 엽떡이든 분식 세트든 마라탕이든 먹어줘. 한식이 시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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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현아 오늘은 2월 13일이야. 이렇게나 더운데 2월이라고 쓰니까 어색하다. 더 자주 많이 써주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이제 묵는 곳에 글을 쓸만한 장소가 없고, 일기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고, 파란 펜도 잉크가 점점 떨어지는 삼위일체로 늦어졌어.

여기는 보츠와나 마운이라는 도시의 게스트하우스인데 말이 게스트하우스지 그냥 텐트 안에 침대 2개만 달랑 있는 곳이야. 리셉션 쪽 테이블에 와서 쓰고 있어. 방금 일기를 3장이나 쓰고 와서 글씨 날리는 거 양해 부탁해. 원래는 좀 더 잘 써.

사람들이랑은 점점 더 친해지고 있어. 지난번에는 몸은 편한데 마음이 좀 외롭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점점 전환되고 있어. 시설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거든.

사막 일정은 모두 마무리되었고 요즘은 초원, 델타, 국립공원 같은 곳을 다니면서 풍경과 동물을 보러다녀. 가장 큰 차이는, 기상천외한 벌레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 무슨 벌레가 손바닥 절반만한데 색도 엄청 화려하고 으으, 캠프 사이로 수도시설 같은 곳 가면 바퀴벌레도 엄청 많고. 나 벌레 공포증 진짜 심한 거 알지. 정말 너무 무섭고 힘들었는데 매번 호들갑 떨고 그러는 것도 사람들한테 민폐인 것 같아서 꾹꾹 참았더니 그래도 많이 극복했어. 이제는 내적으로만 놀라.

에토샤, 나미비아

동물들을 보는 건 정말 재미있어. 내가 갔던 국립공원 캠프 사이드에는 '워터홀'이라고 있는데 동물들은 이곳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은 그런 동물들을 보기 위해 모여들어. 그런데 동물이 하나도 안 와도 우리들은 모여서 앉아있어. 동물이 없어도 풍경이 정말이지 기가 막히거든.

동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허벅지 정도까지 오는 돌담과 펜스가 있고 그 뒤에 벤치들이 있어. 그곳에 앉으면 커다란 물웅덩이와, 그 왼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어. 평지가 드넓어서 해가 뜨고 지는 시시각각 하늘색이 바뀌고 해가 아예 지고 나면 별이 하늘을 수놓아. 그리고 별똥별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처음 보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하늘을 바쁘게 날아다녀. 풍경에 취해서 맥주와 함께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동물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해.

우리는 코뿔소를 여럿 보았는데 코뿔소가 물을 마시기 위해 저편에서 걸어오기 시작하면 벤치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여. 야생 동물과 자연 자체에 대한 경외심에 차서 한동안 워터홀에는 카메라의 작은 셔터 소리, 사람들끼리 동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속삭임, 그리고 바람과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수백여 년간 형성되어온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연'인데 그 흐름의 찰나만을 보고도 사람들이 모두 감동받더라. 정말 특별한 곳이었어.

그런데 이 국립공원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일정이 너무 빡빡했어. 다들 꽤나 지친 상태야. 심지어 나미비아에서 보츠와나 국경을 넘을 때는 히치하이킹, 유사 택시 등을 이용해 4번 환승을 해서 800km가 넘는 길을 13시간 동안 달려왔는데 예약했던 에어비앤비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어. 급하게 새로 구했는데 말이 게스트하우스지, 텐트와 똑같이 생긴 외관에 안에는 또 달랑 침대 두 개 있고 끝이야. 그리고 투어는 새벽같이 시작하고, 하다 보면 찌는 듯한 더위를 경험하게 되는 거지. 다들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해서 14일에는 푹 쉬기로 했어. 물론 텐트가 너무 더워서 쉴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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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14일이야. 일기 쓰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적었더니 세상에 파란색 펜 잉크도 거의 바닥나서 빨간색으로 갈아탔어. 오늘은 그 열악한 샤워실에서 끊겼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물줄기에 최선을 다해서 씻고 진짜 오랜만에 화장도 해서 기분이 너무 좋아. 커피 마시면서 쓰고 있어. 이제 여행 막바지가 되어가고 있어서 너무 슬퍼. 한 5일 전까지만 해도 좀 외롭고 힘들고 했는데 이제는 시간 흘러가는 게 아쉽다. 물론 느린 마을 양조장은 좀 그립긴 해.

오랜만에 시내 구경 하러 갈 예정이야. 매일 사막, 초원하는 동물식물만 주구장창 보니까 사람들 볼 생각에 신나. 아, 그리고 원래는 바오밥나무를 보러 차를 하루 빌려서 한 지역에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차주가 너무너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불러서 취소했어. 바오밥을 못 보게 된 건 너무 슬프지만 나 하나 좋자고 사람들 다 비합리적인 일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중에 제대로 마다가스카르나 탄자니아 가서 원 없이 볼 테야.

아, 여기에 되게 맵고 크리미한 어떤 유명한 소스가 있어. 이국적이고 자극적이면서 맛있더라. 만약 귀국 전에 마트 들릴 수 있으면 사서 갈게. 나 집에 초대해서 요리해 줘. 파스타 해먹거나 나쵸에 찍어서 맥주랑 마시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여기 맥주가 진짜 진짜 맛있어. 우리 하루 평균 인당 4캔씩 마시고 있어.

이제 택시 왔다. 이만 줄일게. 아마 다른 지역에서 다시 쓰게 될 거야. 안녕.

[출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작성자 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