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문답

세 가지 문답
삶의 의미, 생의 이유, 삶의 목적

들어가며

숨을 거둘 때 까지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 애초에 진리가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 혹여나 진리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깨닫는 인식체계를 믿을 수 없다는 것, 결국 이 세상의 작동 원리와 그곳에 존재당하게 된 나의 이유에 대해 그 무엇도 명쾌한 설명을 줄 수 없다는 것.

법적인 의미에서 성인이 된 후 현재까지의 시간은 위 사실들을 마음 깊이 납득하는 과정이었다.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몇가지 성취를 이루고 오감의 쾌락을 충족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 이 모든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문득 의문이 피어나던게 시작이었다. 깊은 회의감이 달갑지 않은 손님처럼 수차례 찾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성실하게 행위하며 밝은 말을 뱉고있는 나의 물리적 실체는 마치 분리된 타자같이 느껴져 종종 몸서리쳐졌다. 모든 현상과 행위에 대한 의심, 인식과 실체의 모순, 사유와 행동의 유리, 괴리감, 기시감 따위의 것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올 때면 나는 순수하게 슬퍼지곤 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타개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나름 성실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손님을 기분좋게 접대하고 잘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이 나의 안정적인 공간, 그러니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늘 긍정편향을 갖도록 길러주신 부모님의 덕과 그동안 부족하지 않게 쌓아온 사회적 자본은 많은 합리화를 가능케해주었다. 이토록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잘 살면 되겠다’는 생각은 나의 사유를 안주시키는 달콤한 안정제였다.

안정제의 효능은 꽤나 탁월하여 나는 깊은 회의감의 뿌리를 찾는 일을 시도에 부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부정적인 감정상태를 환기해주는 흥겨운 것들에 나를 맡겨왔다. 스무살에게는 사람, 상황, 사랑 모든게 새로웠고 새로움에서 오는 자극에 대한 역치는 너무나 낮았기에 단발성의 효과는 상당했다. 늘 즐거움을 추구했다. 실없는 흥에 취해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소한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관계에 책임을 다하고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인지는 지극히 피상적인 자기만족을 주었다.

허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경험은 더이상 신이 나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덧없었다. 자위적인 책임감의 결과는 영 부실했다. 얕게 피어나는 연기에 불과했던, 이 모든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심은 이제 벽력같은 외침이 되어 마음에 요동쳤다. 막연한 불안은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났다. 밖에서 답을 찾아 불안을 잊으려했다. 궂은 경험에 나를 몰아넣었다. 싸구려 자극의 빈도를 높였다. 객기에 가까운 나의 여러 여행 경험은 이 때 대부분이었다. 홀로 대자연을 보고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안했던 것 같다.

지구의 시간은 선형적이고 인지는 비가역적이다. 안정제에 대한 내성은 높아졌고 자극은 익숙해졌다. 그렇게 일상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순간 바다를 마셔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마음 깊은 공허가 생겼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한참 늦었다. 울음을 울어서 해소하고 싶었지만 슬프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공허는 충족되거나 해소되는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지독한 불면증과 간헐적인 기침증세에 시달리던 그 당시의 나는 밤마다 상념의 바다를 부유하며 열심히 노를 저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공허를 달래줄 수 있는 보물섬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그곳은 무한한 공간이었고, 영원한 시간이었다. 시간의 영원과 공간의 무한.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 이 개념은 처음으로 무언가 종교적인 기분을 들게 했다. 두려울 정도로 사무치게 아득해서 나는 그만 노를 놓친 채 답을 찾아 헤매기를 멈추어버렸다. 그 때 부터는 무릎을 감싸안고 고개를 묻은 채 그저 영원과 무한 속에서 내면에 뚫린 구멍이 존재함을 납득할 뿐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해 그 공허를 느꼈다. 마음에 어떤 우주가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깊은 적막과 고요의 고통 속에서 나는 가장 깊은 본연의 자아와 대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숨을 거둘 때 까지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 애초에 진리가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 혹여나 진리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깨닫는 인식체계를 믿을 수 없다는 것, 결국 이 세상의 작동 원리와 그곳에 존재당하게 된 나의 이유에 대해 그 무엇도 명쾌한 설명을 줄 수 없다는 것

그 대화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물 다섯이 되어서야 말이다. 더이상 타협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순수한 수준의 깊은 깨달음은 삶에 대한 세 가지 철학적 물음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목숨은 너무나 부질없다. 산다는 것은 그저 죽지 않은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늘 어딘가에 속아넘어가는 멍청하고 취약한 인식능력과 감각기관이 그나마 가장 선명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는 존재는​ 허상에 가깝다.

먼저 그동안 아등바등 쌓아서 형성한 나의 자아로 사고실험을 해보자. 이는 당장의 사회적, 지리적 여건을 조금만 틀어놓아도 없던것이 되기 때문이다. 문명세계에서 한글문자와 제도 내 교육과정을 열심히 공부하여 국내 스타트업 투자를 업으로 삼는 20대 한국인 여성은 뉴욕 월가에서는 무엇일까. 사우디 왕정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뉴기니섬 외곽에서는 어떨까. 초등학교 걸스카우트 시절 배운 지식이 가장 마지막인 나는 아마 최약체로 금방 사망할테다. 서울대학교 졸업장으로 물고기를 잡거나 독버섯을 골라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국내 스타트업 투자에 대한 인사이트가 멕시코나 브루나이에서 먹힐 리도 없다.

물리세계의 범위를 조금만 더 확장해보자. 아늑한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를 태평양 바다에 위치시킨다면. 하늘에서 떨어뜨린다면. 우주에 보내버린다면. 정신보다도 약해빠진 육체는 순식간에 파괴되어 존재를 소멸시킬 것이다. 무한한 공간을 분모로 하기에 사실 상 무(無)에 가까운 이 좁디좁은 물리세계에서만 나는 살아 숨쉴 수 있다. 사실 이정도 상상까지 갈 필요도 없다. 어차피 고작 백여년, 아니 몇십년 신선했다가 서서히 부패할 찰나의 껍데기였다. 이렇게나 유약한 신체가 손상을 입으면 손쓸 도리 없이 스러지는게 산다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변수를 고민의 세로축으로 포함한다면 무상함은 더욱 깊어진다.
한 세기
전근대
기원 전
진화 혹은 창조
그 모든것의 선대(先代)
무한한 이전(以前)
..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 무엇도 아니다.

누군가는 나의 상상이 과한 것이라 생각할테다. 당장 이번 달 카드값과 내일 거래처 미팅 아젠다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 없다. 생산성과 유용함을 언급하며 나의 고민을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는건 정말 괜찮다. 비생산적이고 무용한 것이 맞으니 말이다. 다만 생산성이라는 준거가 얼마나 무상하고 미약한지 설명하는 일은 양 측의 에너지 손실만을 낳을 뿐이니 하지 않는 것이다. 칠면조에게도 추수감사절의 죽음은 한평생 안락한 환경과 주인의 사랑 아래 과한 상상이었을 것이라는 말도 참는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에게 가장 큰 우려를 각자 고민하며 살면 된다. 공허의 씨앗, 즉 이 모든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심이 피어나지 않는 그들에게는 공허를 마주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진심이다.

허나 나를 정말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비대한 자아를 자랑하는 무식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그동안 쌓아올린 본인의 성취에 취해있고 점수나 순위의 척도로 표현된 결과를 유독 과대평가한다. 요령과 솜씨가 베어있는 말투와 제스쳐에는 높은 자부심이 매력적으로 흘러넘치지만 동시에 깊은 내면과 대화할 줄 모르는 자들의 특성인 미묘한 천박함이 숨겨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은 노력과 능력으로 이루어 낸 고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본인을 뭐랄까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이들과 대화하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특히 무언가 계몽에 대한 것, 선형적 발전이나 진화, 혹은 합리적 이성의 우월함 같은 얘기를 들먹이기 시작한다면 나는 숨이 꽉 막히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든다. 늘 친절을 유지하며 대화의 갈등을 유연하게 피하는데에 익숙하지만 이런 대화가 길어질 때에는 나도 평정을 잃는다. 나는 잔뜩 늘어놓여진 궤변의 아무 귀퉁이를 주워서 잡아끌고 몇가지 억지스런 화술로 그 논리를 칭칭 둘러 결국 스스로의 말꼬리에 목이 졸리는 꼴을 보아야 비로소 직성이 풀린다. 허나 가끔 이마저도 귀찮아질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을 틀어막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그의 저항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나는 평소에 부족한 약간의 근력운동도 할 수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당장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 동그랗게 싱크홀이 생겨 내려앉아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이런 상상마저 하게 만드는 이들에게는 평생 모르고 살던 공허의 고통을 인지시키고 싶어진다. 삶의 무상함에 대해 거듭 강조하여 외치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나 자부하는 산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두 번째, 왜 살아야 하는가

산다는 것이 그 무엇도 아니라면, 유약한 육체에 갇힌 영혼이 평생 진리를 모른 채 기만당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면, '살고있는 나'란 결국 부패할 육체에 어떠한 인지능력과 감각기관이 우연히 잘 조합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데 그런 삶이 절대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이렇게 살다가 당장 내일 너무나 허망한 이유로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그러면 왜 살아야하는가. 아무것도 아닌 삶이 심지어 감각적으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면 왜 자살하지 않는가.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이유도 모르게 세상에 피투된 나는 왜 이 숨과 맥박을 유지하는가.

잠시 다른 얘기로 넘어가보자.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문자와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과학기술은 선대의 지식을 기반하여 더 발전된 수준을 이루고 수의 논리는 점점 체계화된다. 읽히는 것에 가치가 있는 문학의 절대량은 꾸준히 늘고 시대가 담긴 역사서와 예술도 남는다. 하지만 모든 지식에게 축적이 축복으로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몇몇 지식은 서지와 활자 형태로 남아있다가 어느순간 '틀린'것으로 규명되어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사회적 맥락과 닿아있는 사상일 경우 그 확률이 높아진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이론과 사상은 이미 반박되었거나 혹은 언젠가 반박되길 기다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다. 이는 내가 모든 정치적 입장이나 사상적 태도, 신앙적 믿음을 포함하여 무언가를 확언하길 극도로 꺼리는 이유이다.

물론 '틀림'으로 규정된 지식이더라도 그 가치는 남아있다. (늘 반박으로 규명되는 철학을 특히 염두하고 하는 얘기가 맞다.) 허나 그 가치는 감히 측정할 수 없는 학문적 고민과 그만큼의 구현이 수반되었을 때 가능해진다. 나의 얕은 정의감이나 짧게 고민한 철학은 무조건 언젠가는 반박될테고 학문적 수준으로 정연하게 정리되지 못할 것이기에 가치도 없다. 반박이라는 단어가 비교적 가볍기에 지금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굳이 부연하자면 이는 나의 첫 깨달음인 진리문제와 연관된다.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나의 짧은 철학은 너무나 자명하며 현재 수준에서 더욱 깊은 고민과 공부가 수반된다 하더라도 전복될 수 없다. 다만 신이라는 절대자가 존재할 수도 있고, 사실 사후세계나 윤회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억겁의 세월 후에는 -근대에 실패했던-모든 존재가 진리라고 납득할 수 있는 대진리가 정말 있을수도 있기 때문에, 혹은 지금은 감히 상상도 못할 어떠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영원한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반박될 것이라 명하는 것이다. 다만 현재는 그 모든 가능세계를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근거이다.

나는 흄처럼 기존의 사상체계를 무너뜨릴만한 논리가 없고 쇼펜하우어처럼 금욕으로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없다. 마르크스같은 부지런한 혁명가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만약 사유의 끝에 닿은 깊은 허무와 회의에 나를 가둔다면 나는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삼류 사상가에 그칠 것이 뻔하다. 다행히 나는 사유가 여물기 전에 그런 작자를 많이 보아왔기에 경계할 수 있다. 본인만의 문제설정에서 스스로와의 진리물음에 정합한 답변을 내리고 이후 모든 행위를 사후정당화에 부치면서 멋대로 남에게 사상 내지 실천을 강요하는 부류를 잘 알고있단 말이다. 나는 무상함과 삶의 무의미를 칼처럼 휘두르며 죽음이라는 풍차를 향해 몸을 던지는 돈키호테가 되지는 않겠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너무나 깊은 확신을 갖고있어도, 그 사상을 평생 안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야 한다.

생의 이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갑자기 지식의 축적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은 결국 나의 확신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사상적 확신에 정합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어떠한 생의 이유도 찾을 수 ​없기에. 그러나 그 판단을 절대 믿을 수 없기에. 나는 역설적으로 죽어서는 안된다.

세 번째,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당장 죽어도 아무 상관 없지만 그래도 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본격적으로 고통스러워진다. 가치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치물음은 앞선 두 문답처럼 사고실험과 논리로 결론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너무나도 어렵다. 세 번째 문답은 나의 순수한 주장이며,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닌 동의와 반대의 영역이 될테다. 어쩌면 믿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준 나의 성실한 친구라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는 함께 즐겁게 토론하고 싶다는 진심도 전한다.

살긴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어차피 자살하면 안된다는 것이 생의 이유라면 나는 모든 생산활동을 멈추고 환각제를 복용하며 단칸방에 누워있는 것이 최선이다. 환각제의 부작용이 가져올 불쾌가 우려된다면 정교한 옥시토신과 몇가지 호르몬이 배합된 주사, 혹은 헉슬리의 멋진신세계에 나오는 소마를 개발하는데에 한평생을 바치는 것도 답이 되겠다. 아니다 완벽한 환각제를 개발하는 기분좋은 꿈을 지속하는 기계에 누워있는게 가장 좋겠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이런 삶은 살고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삶을 죽지않고 살아야 한다면 결국 가장 근원적인 쾌를 추구해야 한다는 답이 도출되지만, 나는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니 가치물음이다. '어떠한 이유'를 고민해야한다. 무엇으로 살 것인지 스스로 정의내려야 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을 행위의 준칙으로 삼는 것 만이 남은 삶을 영위하는데에서 발생하는 공허의 고통을 줄여줄 것이다. 그러니 선언한다.

사람은 시대와 순간에 공명하며 살아야 한다.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과 나의 인식, 관계,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 육체, 공간 모두 무상하다. 사유에서 발생하는 나의 고통도 영원의 시간에서 어떠한 생명체는 분명 완전히 동일한 것을 느꼈거나 느낄 것이이며 애초에 무한한 우주에서 이미 동시에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허나 나는 나의 생을 유지하기로 결심했기에 나의 인식체계와 감각기관의 기능을 구태여 파괴시키지 않을테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가치를 성실하게 탐색할 것이기에 이 주체에 의지해야 한다. 인식체계와 감각기관을 멍청하다고 맹비난하며 회의주의 철학자 같은 태도를 견지했지만 결국 이들이 나의 존재에 가장 직접적이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줄여가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인식적으로 충만해야하며, 감각적으로 쾌락적이어야 한다. 이를 무한한 선택의 기로가 내재된 삶의 절대적 대원칙으로 삼고 늘 '그 순간'에 충실히 느껴야한다. 허나 순간의 집합은 기간이며 이는 시간에 종속된다. 시간에의 종속은 무겁다. 양자역학이 성숙하기 전인 현대의 인간에게 시간은 선형적이며 자의로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간에게는 기억력과 감각재현, 심할 경우 수오지심이라는 저주마저 내려져있다. 그러니 이 순간에서 어떠한 중용이 형성된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마냥의 찰나주의자로 남을 순 없는 것이다.

그 답을 나는 시대에서 찾았다. 내가 가장 선명하게 인식하는 현재의 나는 곧 이 시대를 살며 이 환경에 놓인,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나다. 허상이어도 허상임을 알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다. 진리의 부재와 늘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인식가능자에게 드디어 상대적으로 가장 확실한 비교기준이 생겼다. 바로 이전까지의 '집합으로서의 자신'이다. 스스로를 타산지석삼아 앎의 진화를 체감한다는 것은 진리라는 지향점을 상실한 인식체계에게 비로소 의미를 준다. 이러한 깨달음은 몇가지 강령으로 이어진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최선을 다해 매 순간 살아낼 것. 이정표도 지시등도 없는 삶에서 늘 직전의 나보다 나아지는 방향을 택할 것. 그 기준은 너무나 우연하게 주어져버린 나의 시대에, 그리고 이를 치열하게 탐구한 결과에 발맞출 것.

그러니 시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 어마어마한 우연은 나에게 과연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늘 곤두서야만 한다. 시대가 가장 필요로하는 살아숨쉬는 인간상은 무엇인지 답을 내려야한다. 그 의미를 찾고 이를 행위에 일치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통 속의 뇌 혹은 톱니바퀴로 개조되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 이유가 없다. 가장 신선할 때 자연의 비료가 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마음 깊은 공허를 안고 시대와 순간에 최선으로 공명하며 사는, 성실한 인내자로서 살겠다.

나가며

무신론자인 나에게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마치 신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어떠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만드는 개념은 시간의 영원과 공간의 무한이다. 세 가지 문답도 이 비인격 절대자 둘을 기반으로 도출되었다. 즉 나에게 종교적인 것이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과 직결된다. 이러다가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것이고, 그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한다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2023년 7월 현재 성인 이후로의 고뇌를 모두 정제하여 세 가지 문답을 마쳤지만, 나에게 어떠한 새로운 종교적 체험이 일어날 여지 나아가 기대를 남겨둘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이 모든 고뇌와 상념을 단박에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치부해줄 무언가를 막연하게 그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