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아름다움이 깃든 삶의 양상들

소박한 아름다움이 깃든 삶의 양상들
발행을 미뤘던 재작년자 미완의 문단들을 조금 엮어서

브루나이 섬의 어부를 안다. 한낮에 만난 곤경에 처한 여행자를 작은 배에 태워 해수면에 석양이 일렁이기 시작할 때 까지 국경의 부두로 데려다주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바다의 해는 빠르게 저물기에 그가 귀가하던 물길은 절반도 더 가야하는 시점에 이미 어둑하였을 것이다. 대가는 받지 않았다. 저녁무렵 해로로 국경을 넘어야하는 생경한 경험에 정신이 없던 어린 여행자는, 이제서야 그의 귀가길을 곰곰히 상상해보는 것이다. 섬나라의 어부라면 해양기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해박하리라는 상식과 함께 말이다.

열차의 맞은편 침대를 쓴다는 이유로 인사말도 통하지 않는 타 인종에게 친절을 베푸는 러시아 중부 사내의 삶은 또 어떠한가. 요구한 적 없거니와 규격이 맞을지도 의심스러운 투박한 보조배터리를 건네는 손에는 순전한 선의가 담겨있다. 낙후한 오프라인 번역기로 열차에 오른 목적을 공유한다. 사내는 일을 마치고 반년만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드넓고 척박한 땅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삶의 조각은 대개 이런 양상이다. 묘하게 들뜨면서도 동시에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 하차하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고작 2분 남짓한 정차 시간을 혹여 놓칠까 하는 분주함과, 여행자의 새벽잠을 깨우지 않기 위한 배려가 동시에 담긴 그만의 몸짓이었다. 시베리아에는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수많은 정차역이 존재한다. 머무는 공간이 워낙 열악하기에 맞은편 승객이 짐을 내리면 아무리 깊은 잠이어도 금방 깨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럴 때 마다 굳이 몸을 일으켜 배웅할 필요는 없었다.

지평선에 사는 소녀가 있다. 노래부르길 좋아하고 낯가림없는 귀여운 아이다. 함께 몽골의 초원을 뛰놀며 노래를 부른다. 손을 잡고 몇바퀴 돈다. 빙글빙글 돌아도 모든 시야가 지평선이다.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원의 진가는 일몰에 더욱 드러난다. 건물도, 언덕도, 심지어 나무도 없는 대평원에 지는 해를 본적 있는가. 타오르는 정념같은 태양은 한 숨도 쉬지않고 열정적인 붉은 기운을 대지에 뿜어낸다. 본인이 저물어가는 순간을 인지하는듯 지평의 절벽에 접하는 순간부터 더더욱 선명한 색들의 광채를 자랑한다. 절경을 담으려 혹사시키던 눈이 그만 일렁임을 참지 못해 어질어질한채로 해를 등지면, 밤의 푸른색이 섞이기 시작해 탁할대로 탁해진 보라빛 하늘에 교연하게 떠오른 둥근 달을 마주한다. 그 정적인 힘에 가만히 굳어선다. 모래냄새가 섞인 쌀쌀한 바람이 날아드는대로 내비둔다. 소녀는 한참 전에 일상적 풍경에 흥미를 잃고 주방에 돌아갔다. 남겨진 도시의 여행자는 차오르는 달밤을 온전하게 맞이하며, 눈부심과 모래바람이 만든 눈물을 다시 한차례 조용히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나는 철저하게 6펜스를 좇았다. 달의 편리한 대척점으로써 그저 부정만을 담은 메타포로 성실했던 1년을 폄하할 마음은 없다. 달이 찬란하고 6펜스가 초라하다고. 그건 오직 폴 고갱이 주식을 중개하는 세상이기 때문일테다. 대문호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활개가 시대의 지향점이 되던 시절에도 어느정도 가능하겠다. 허나 현대, 탈근대, 그러니까 대진리를 손쉽게 해체하고 신앙을 냉소하는 시대, 모든 성취의 평가척도가 가성비로 환원되고 신념은 고작 나의 먹고사는삶을 한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한 때, 거대하고 복잡한 담론들은 고작 이지선다의 n승으로 분류되어 나와 타자의 정체성을 고착시키고 배척하는 시대, 기계의 무한한 발전으로 전례없는 낙관과 전례없는 존재론적 위기를 전지구적으로 동시에 겪고있는 말도안되는 격변에. 내가 좇고있는 그 가치를 실용성만 보유한 인위의 것이라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시대와 순간에 공명하며 성실한 인내자로서 평생을 살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을 알 수 없는 향상심과 증명욕, 마르지않는 앎과 이해를 향한 갈망, 불을 삼켜도 좋을 것 같은 마초적인 영웅주의, 부조리와 고난에 가득찬 삶을 기꺼이 인내하겠다는 마조히즘적인 실존주의자로서 살다보면 매번 어렴풋한 이해에 불과했던, 소박한 아름다움이 깃든 삶의 양상을 진정으로 받아들게 되는 날을 강렬하게 바라고는 한다. 젊은 날의 방황 덕에 넓은 세계를 떠돌며 발견했던 여러 삶의 양상들을 말이다. 브루나이의 어부도, 러시아의 노동자도, 몽골의 소녀도. 역한 향을 숨길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철학을 전공하는 자가 어찌 마리화나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킬킬웃으며 연신 연기를 뿜던 짐바브웨 청년도. 강도높은 신체의 수행과 정신의 고양을 매일 예외없이 반복해온 발리 요기의 깊은 평화가 담긴 눈빛도.


얼마나 신날까. 에리식톤의 저주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충만하고 아름답게 산다면. 매일 읽고 쓰고 진리를 고민하고 온갖 현인들의 말씨를 인용해 너희와 함께 사랑과 삶을 논하겠지. 어쩌면 글쓰기와 고전읽기를 끝까지 놓지 않는 이유는 언젠가 그러한 삶의 양상을 살게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길 원하기 때문이다.

세살에 국문을 모두 떼고 양면색종이 밝은 면에 시를 쓰던 유치원생부터, 장래희망 칸에 작가를 적어내던 치기는 고작 1년뿐이었으면서 가장 좋아하는 교과목으로 늘 문학을 꼽던 청소년기에도, 대학전공이라는 당시 나름의 최고 성취를 인문학에게 내어준 뒤 그 사실에 혼자 설레하던 대학생활도, 스물다섯 모든 이사짐 중 몇백권의 책을 노끈으로 묶는 것 부터 시작해 12평짜리 첫 독립공간의 한 벽면을 온전하게 책으로만 채우던 나에게.

지금을 단 한순간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