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로부터

신세계로부터
샌프란에서 쓴 일기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보헤미안이었던 드보르작이 미국 체류 중 느낀 장엄함과 압도감,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동시에 표현한 걸작으로 유명하다. 현시대에는 스릴러 영화의 주제곡으로나 여러 응원가, 술게임으로 귀에 익숙해졌다만, 골드러시와 서부개척 절정기의 이민자 예술가를 상상하면서 듣거든 멜로디가 분명 새롭게 마음에 닿을 것이다. 더군다나 창업 후 서울 이상의 대도시를 처음으로 방문할 일이 잦아진 나로서는 이 곡의 의미가 특별하다.

예를들면 이런것이다. 도쿄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바쁘게 걷다보면 어느순간 마천루와 초고속열차, 낯선 언어와 오버투어리즘에 둘러싸여 마음이 알수없는 갑갑함으로 일렁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최고품질의 노이즈캔슬링을 자랑하는 헤드셋을 연결하며 드보르작을 듣기 시작한다. 구글맵과 눈앞의 교차로를 몇번 비교하며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보통 다음 곡으로 넘어가있다. 랜드마크임이 분명한 건물 입구에 들어선다. 헤드셋을 종료한 뒤 숄더백에 대충 집어넣는다. 리셉션에 방문 목적을 밝힌다. 이상하리만치 첨단화된 엘리베이터에 탑승 안내를 받는다. 귀가 조금 먹먹해질 때 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보통 알아서 필요한 층에 멈춘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딛으며 일곱가지가 넘는 메신저 채널 중 정답을 찾아 도착사실을 밝힌다. 제기랄. 긴장감에 혀끝을 꾹 깨물며 잠시 생각한다. 130년 전 드보르작이 신세계에서 느낀 중압감에 비하면 이것은 티끌도 아니라고말이다.

Dvorak Symphony no 9 4th

티로 팀은 한국, 일본, 미국 시장을 모두 동시에 보고있고 이를 위해 나의 도쿄 이주가 확정되었다. 도쿄의 독립적인 비즈니스 문법을 완전히 체화하기 전, 스스로가 가진 이상의 상방을 한번 크게 높일 필요가 있었고 이에 조금 급작스럽게 샌프란시스코 출장이 잡혔다. 주변의 영향과 새로운 자극들에 꽤 민감하고 수용도가 높은 나는 최선을 다해 이곳을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 목표였다.

나에게 미국, 그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는 신세계의 이데아같은 곳이다. 상용화되어 돌아다니는 자율주행 택시, 곧 군용 로보트로 변신할 것 같은 사이버트럭, 모든 옥외광고와 판촉물을 장식한 AI 서비스, 카페에서도, 길거리에서도 흔하게 들리는 미래 기술에 대한 일상적 대화. AI창업을 하면서 아날로그를 편안해하고, 고전음악과 고전문학으로 삶의 숨쉴 구멍을 채우고, 죽은 작가가 아니라면 아직 가치있는 책이 아니라는 농담을 자주 하는 나에게는 확실히 낯설었고, SF영화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마냥 순수하고 즐거운 감탄과 경외로 그치기엔 어려웠다. 미디어가 이정도로 발전해서 충분한 사전학습이 가능했기에 다행이었지 여차하면 얼빠진 바보마냥 정신을 못차릴 뻔 했다.

같은 경험에 대해 해상도를 높이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간의 삶에서 일구어낸 내면의 단단한 격자틀에 경험을 실시간으로 통과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경함이 퇴색되기 전 글로써 내용을 남겨두는 것이다. 자주 채택하는 글쓰기의 방식은 아니다만, 2주동안 나를 지배했던 주요한 감정인 '신남'을 남겨두기 위해 먼저 사진과 짧은 설명들을 나열한 뒤 '글'을 써두려고 한다. 한없이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만 블로그에 쓰는 사람도 맞지만, 짧은 글이라면 실없는 농담을 섞고싶다는 충동을 참기 어려워지는 사람 또한 나다.

그러니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그럼 시작!


마루 SF 체크인, 시차적응은 힘들다.

엔비디아 GTC, 세계적인 박람회에는 사람이 일단 너무 많다. 산 호세의 로컬 지하철을 타봤다. 빈좌석마다 쓰레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나뒹구는 철저함이 인상적이었다.

티들(티로&와들) 깐부 결성!

산 마테오 위워크. 한인 기업가들이 꽤 입주해있고 라운지 뷰가 너무 좋다. 근처에 식당이 많지 않아서 다들 도시락을 싸온다고 한다. 링글, Yourly, 런베어 모두 화이팅

마루SF에 거주하면 필수 참여 프로그램들이 있다. 가끔 프로그램 날에는 이렇게 피자를 시켜주신다. 상호명은 피자가이즈. 세글자를 초과하는 고유명사에 취약한 누군가는 나이스가이피자라고 기억하던데, 이쪽이 후킹 면에서는 더 나은 거 같기도 하다. 사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멕시칸 피자가 가장 맛있다. 모두가 인정했다.

마루SF 스탠바이미에 티로를 띄워보려던 작은 시도 - 실패로 돌아감

주말 중 다녀온 그림같았던 Lake Tahoe

다 녹은 눈에서 스노보드도 슝슝. 리조트 이름이 'Heavenly'인데, 드넓은 타호가 한눈에 보이는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다보면 작명의 배경에 있는 자부심이 완전히 납득이 간다.

이정도의 스프링시즌 라이딩은 처음이었는데, 가볍게 입고 타는것도 꽤 재미있다. 반팔 입으신 분들도 많았음. 이례적인 엘니뇨로 너무 이르게 찾아온 따뜻한 날씨에 눈이 거의 없었다. 30분만 멀어져도 영상 30도가 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강원도보다 더 재미있었는데-종종 등장하는 흙바닥 장애물 피하기도 일종의 콘텐츠!- 고작 이정도로도 너무 즐거워하는 우리를 보고 은기오빠가 하염없이 안타까워했다.

시티의 세일즈포스 타워 4층에는 야외 정원이 있다. 고등학교 급식시간 운동장마냥, 회전초밥처럼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점심 직후에는 안전거리 확보가 잘 안될정도로 빽빽하게 회전한다.

세일즈포스 타워는 샌프란 최고의 마천루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것 보다 하늘을 보고 찾아가는 편이 이동시간을 단축하는데에 효과적이다. 규리랑 용원이랑 블루보틀 마셨다. 블루보틀에서는 반드시 아이스 놀라를 주문할 것.

시티에는 이렇게 소프트웨어 브랜드가 래핑된 교통수단들이 많다. 눈에 보이는 도시의 모든 광고들이 AI기업인 것도 압권.

@Pier 39

Fun fact: 티로와 하이퍼노트는 친하다!

트램 타고 가다가 마주친 a16z

은기오빠 찬스로 방문한 구글 Bay View 오피스. 이래서 빅테크 다니는구나 처음으로 직장인이 부러웠다.

유나와 구글은 동갑내기다

Can your iPhone do this?

여담으로 손질안된 긴머리가 내내 거슬려서 레이어드 부분을 만두모양으로 묶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종종 하고다녔다. 샌프란의 햇살과 잔디밭, 구글의 원색 로고, 반묶음이 담긴 이 사진은 나의 온갖 메신저 신규 프로필이 되었다.

마루SF 근처(=도보 20분) 최고의 카페 굿띵커피. 피스타치오 아인슈페너가 시그니처 메뉴다.

이 날 오전 마루SF 필수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듣는 내내 매운 음식이 너무 땡겼다. 수강신청 실패로 금요일 오전 수업을 듣는 학생이 되어, 겹강친구랑 내내 점심메뉴 고민이 담긴 농담 카톡을 나누던 시절이 떠올랐다. 사천식 매운, 정말 매운 쌀국수를 먹고 입안과 속이 잔뜩 얼얼해진채로 굿띵커피로 향해 피스타치오 아인슈페너 음료를 마셨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마라탕 먹고 두쫀쿠 먹는 한국 여성인 것이었다.

하루종일 굶다가 해피아워를 보고 냅다 워크인으로 들어간 해안가쪽 펍. 메뚜기떼 마냥 포식했다.

샌프란 지역 특성에 기반한 조류 생태계 고찰 - 갈매기의 비둘기화, 비둘기의 참새화 현상을 중심으로

누리랩스 재성님 초대로 방문한 HF0 배치 애프터 파티. SF에서는 이런 하우스 파티에서의 네트워킹이 꽤 흔하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 어떤 감성인지 잘 모르겠다. AI 빌더, 엔지니어들을 한데 모아서 DJ와 바텐더를 부르고 서로 어떤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목청높여가며 얘기하는 경험은 이색적이었다. 그렇다고 즐겁지는 않았다.

EO 태용님 초대로 방문한 DelightX 행사. 일본에서 미국진출을 지원하는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 데모데이였다. 사진은 일본의 전설적인 여성 창업가 DeNA의 토모코 남바 대표님.

도쿄에서 그동안 맺은 이런저런 스타트업 유관 인맥이 겹지인으로 많이 밝혀져 꽤 의미있었다.

은기오빠 집에서 바베큐 파티. 은티들 깐부 결성(은기&티로&와들)!

마루SF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부엌 쪽문 뒤 작은 마당의 불멍 장소를 이용하자.

무언가를 태우며 튀는 불티가 아니라 두꺼운 헝겊이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끼는듯한 불의 진짜 소리를 듣자.

랄프톤 구경과 EO 하우스 빌더나잇.

마음이 시키는 일을 온전히 해내는 자의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격자틀에 남은 몇가지 생각들

1/

당연하게도 기업 운영에 정답은 없다. 상황에, 사람에, 시장에따라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고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누군가의 정의역에서는 그의 주장이 순수한 참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밑단까지 논리정연하더라도 철학에 어긋나면-하기 싫다면- 과감하게 기각해도 된다. 수많은 자극과 강한 외부의 설득, FOMO, 불가지에 휩쓸리지 않고 부디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과연 스스로가 어디까지 실리와 논리를 따를 것이고, 어디부터 철학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한다. 그 선택을 다시 스스로 굳게 믿음으로써 이를 신념으로 만들고, 마음의 이정표로 삼아 길을 밝혀가며 언젠가는 그 신념을 증명해내는것이 기업인이다.

2/

젊음이 아깝다. 세계 1등만을 바라보며 수없이 피봇하는 젊은 창업가들이 짠하다. VC는 돈과 평판을 잃지만 창업가는 세월을 잃는다. 리스크의 무게가 다르지만 VC의 목소리가 높다. 허나 이곳은 세계 1등이라는 가능세계가 가장 선명한 곳이다. 여기에서의 1등은 세계에서 1등이다. 그곳에서 젊음을 다 불태워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본인의 마음이 진정 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낭만이 아니면 무엇인가. 원래 낭만은 짠한 면이 있다. 나는 글쎄. 나이가 들어가며 리얼리스트적인 면이 늘어가기도 하고 얼리스테이지 창업가라는 딱지를 조금씩 떼어가는 입장이라 그런가. 그래도 세계관 최강 보스를 잡으려면 일단 2차전직이 필요하다는 주의다. 궁극기를 익혀서 다시 올테다.

3/

마주치는 모두에게 인사를 잘한다는 것은 어린시절부터 들어온 칭찬이자 조건반사처럼 굳어진 습관이다. 악수를 기대하는 상대에게 목례를 건네는 일을 열네번정도 반복하고 나니 버릇이 조금 고쳐졌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은 자랑스러워하면 된다. 한평생을 동아시아에 살며 신의성실과 겸손, 예의바름을 황금률로 익혀온 내가 이제와서 바뀔것도 없다. 여전히 나는 가진것보다 과장하지 않을것이고, 공허한 욕망보다 누구나 납득할 결과로 보여줄 것이며, 남에게는 늘 선의를 앞세워 예의를 지킬 것이다. 이를 동양철학적 관점에서의 '덕'으로서, 가장 가치있다고 여길 것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양질의 동기부여와 활활타는 증명욕구를 잔뜩 안고 돌아왔다.

신세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