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를 조금 더 사랑해보자

도쿄를 조금 더 사랑해보자
흐린날의 도쿄타워

일본 여행에 로망을 가져본 적은 없다. 모든 음식의 끝에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간장류의 감칠맛은 입에 잘 맞지 않는다. 분명히 탁월한 문화의 산물들도 굳이 찾아 취할만큼 취향에 들지는 않았다. 비주류성에 대한 미성숙한 거부감이 있었던 어린시절에는, 일본에 관련한 것들이라면 괜히 더 피하기도 했었다. 매년 제2외국어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단 한번도 일본어를 수학해본적이 없었다.

일본 진출이 결정된 올해 2분기부터 총 4번의 출장을 다녀왔다. 순수 체류기간은 두달이 조금 넘으니 거진 시기의 1/3을 도쿄에서 지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시장기회와 초기의 작은 성과들은 긍정적인 동기부여로 작용하여 도쿄에 가야할 이유를 명확히했다. 다만 그 과정은 정말이지, 너무나 고되었다. 돈을 쓰러 타국에 가는 일과 벌러 가는 일은 천지차이라고 하였나. 내 물건을 팔러 가는 일은 분명 그 이상의 영역이다. 한국, 서울, 그중에서도 IT/벤처라는 너무나 작은 시장에서 성실하게 쌓아올린 나의 사회적 자본은 너무 귀중하여, 오히려 해외에 나갈때는 그 선명한 상실감이 도리어 역린이 되었다. 한평생 자신있었던 말하기와 글쓰기 능력도 마찬가지다. 장점으로 받아들여지던 기질적인 외향성, 살가움, 진솔함이 '저곳'에서는 자칫 무례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지하고싶지 않은 심리적 위축을 가져왔다.

8월 중순에 다녀온 세번째 출장의 목표는, 도쿄를 더 사랑할 이유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업을 되게 만드는것이란 언제 어느곳에서든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생활적인 면에서 이 도시를 더욱 사랑해야만 했다. 나라는 사람은 의미를 고찰하는 잡념이 깊고, 스스로와의 지쳐나가떨어질 선문답 끝에 내린 결론이 마음이 시키는 방향과 진정으로 일치할 때 압도적인 실천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 시장에서 티로가 잘 팔릴 수 있는 몇가지 사실 기반의 논리적 가설과 해내야할 액션에 대한 사고실험은 이미 마무리했다. 그러니 형언하기 어려운 나의 마음의 방향을 이 도시에 머물고, 생활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성장하여 입증하는 일에 너무나 큰 즐거움을 느끼는 쪽으로 조율해야만했다.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깊게 이해해온 자신의 욕망의 방향성 후보군과, 이 도시가 가진 무수한 매력과 환경의 후보군을 하나씩 연결시켜주면 되는 일이다. 물론 그 기준에는 적합성 뿐만아니라 지속성에도 매우 중요한 가중치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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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호기심이다. 미지, 오지, 새로운 것, 흔하지 않은 것, 아름답거나 그로테스크한 것, 전혀 몰랐던 사실, 배경이 되는 역사 같은 일에 원래도 사족을 못쓰는 편이다. 일본을 앎의 대상으로 곰곰하게 들여다보며 개념화하는 순간 특유의 특이성들은 압도적인 매력으로 다가오게 된다. 일본에 체류하며 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고양한 두가지 구체적인 요소는 국화와 칼 통독과 (진심으로)신칸센이었다.

국화와 칼은 태평양전쟁 종전즈음 집필된 북미의 일본학 서적으로, 현대의 비판점과 별개로 정말 훌륭한 인류학 고전이다. 원체 고전은 필연적으로 시대적 한계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이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일은 현대인의 과제이며 더욱 성실히 읽어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화를 흔들며 친절히 환대하지만 가미카제를 행하고 일억옥쇄를 외치는, 겸손하지만 오만한, 예술의 혼을 소중히하면서도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무사를 숭배하는, 모든 특질들이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게 'but also'로 묶이는 타국에 대한 미국인의 고찰을 담은 고전. 이를 현대 한국인으로서 읽어내는 일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충분했다. 경험이 더 성숙하고 나면 이에 대한 서평과 현대 조선 상인으로서의 경험을 엮어 좋은 글을 한편 쓰리라. 좋은 글을 쓰고싶다는 마음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동기부여 요소이기도 하다.

별개로 신칸센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정제해서 쓰고싶다. 직관적인 느낌으로 그 감정에 대해 얕게 공유했을 때, '철스퍼거'라는 표현을 아냐며 장난스레 웃던 대학동기의 표정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귀국 익일 공항에서 사온 품질좋은 니혼슈에 함께 취해, 빽빽한 도쿄선이 아니라 신칸센이 가진 다른 매력을 신나게 설명하는 일은 가장 친한 그녀의 사랑스러운 장난기만 더 자극할게 분명하다. 아무튼 신칸센은 정말 최고로 멋있다.

2/

다음은 일상이다. 도쿄에서의 일상이란 매번 잠자리가 불편하고 가장 대중적인 맛이 입에 맞지 않는 생활을, 사업 확장이라는 과제하에 영위하는 일이다. 이러한 난관에서는 현명한 선인의 지혜에 기댈 필요가 있다. 먼저 전통적 개념에서의 지덕체를 실현하기 위한 규칙적인 운동이다. 두번째, 세번째 출장은 모두 한여름이라 날씨가 야외 생활운동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40분 이상의 산책은 성실히 해냈다. 생활운동에서 오는 일상적 성취감은 남은 일과를 질높게 행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동력이다. 한국에서는 요가만 했었는데 돌아온 뒤 러닝을 더했다. 심폐를 튼튼하게 하여 날좋은 도쿄에서 기분좋은 시티런을 하고싶어졌기 때문이다.

다음은 일상적 행복에 대한 믿을만한 연구끝에 내린 결론인, 좋아하는 사람과의 식사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마음을 둘 곳이라고 표현할수도 있겠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즘은 교류가 드물었던 동창을 오랜만에 만나거나 같은 관심사를 가진 신뢰할만한 타인과 비교적 쉽게 연결되는 일이 모두 가능하다. 중요한건 이렇게 확장된 기회를 얼마나 의미있게 전환할 수 있는지에 있다. 나에게는 행운의 작용이 분명했을, 도쿄에서 맺게된 몇가지 인연들이 있다. 그렇게 도쿄에 터전을 잡은 이들이게 나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교류하고, 일상에 들어서고, 시간내어 맛좋은 식사를 함께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을 좋아하고, 시간을 더 보내고싶고, ​보고싶어하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심어둔다. 사실 인간이란 정언적으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인지라, 역설적이게도 가장 진심으로 대할 때 가장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실질적인 사항들을 차치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욱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 일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 행운과 인연들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느낀다. 도쿄를 더욱 사랑해보겠다는 의지에 가장 직접적인 요소이니 말이다.

3/

마지막은 언어다. 흔한 20대 초반답게, 나는 지독하게 방황하던 시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상당히 좋아했다. 창업을 준비하던 시절 비슷한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으로, 지금 당장 살아있는 사람 한명을 만나 1:1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겠는가- 하는 질문을 나눈 기억이 난다. 일론머스크, 잭 도시,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 등에 이어 혼자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답했었다. 어릴때야 노르웨이의 숲이라던가 해변의 카프카를 작품으로서도 충분히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 작품들보다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를 더욱 좋아한다. 시대에 대한 비판보다 그 시대를 사는 청년으로서의 끝없고도 끈적한 내면의 고민을 다루는 점이라던가(내면고찰 없이 사회고발이 앞서는 작가는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와 위대한 개츠비와 마의 산에 공명하는 작가라는 점, 무언가를 갉아먹을 수 밖에 없는 삶인 창작인이자 예술가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자리에 오르면서도, 꾸준한 신선함을 공급하기 위해 사실상 수행에 가까운 생활을 살아내는 덕과 품성까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나서 와타나베처럼 마의 산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난해한 내용을 읽어내고자 한참을 끙끙거렸다. 당시 20대 초반 스스로의 인격적 성숙을 마주하던 여정을 분명하게 함께해준 작가이기에 그는 너무나 특별하다. 이런면에서 나는 분명 논리정연한 철학가의 사상보다는 맥락과 감정, 예술에 가까운 작가들의 삶의 양상에서 더욱 지혜를 얻고는 한다. 그러니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열심히 써내는것이다.

일본어를 잘하고싶다. 하루키의 에세이와 인터뷰를 원문으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유난히 글을 쓸 때 자주 활용하게되는 일본어 번역체를 깊게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한자의 음독과 훈독, 예외적 활용과 해석을 꼼꼼하게 학습하여 어문에 대한 이해를 한차원 더 깊이할 정도로. 동아시아 인문학도임에 그렇게나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한자 하나 제대로 떼지 못했다는건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몇년을 성실한 학습에 바쳐보리라. 사업과 함께일테니 물론 쉽지 않을것이고, 시간도 정신력도 부족할테다. 허나 어차피 짧은 시간안에 많은 양을 외우는 것은 가장 자신있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확실한 강점이며 단 한번도 져본적도, 스스로를 의심해본 적도 없는 능력이기도 하다.

도쿄에 20대 후반을 잘 부탁한다는 의지이자 선언의 표명을 마치며. 조금 더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