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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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된 밤

몇달간의 나는 운영하는 회사에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매어, 책읽기와 글쓰기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물론 실용서적은 너덧권 읽었다. 유발하라리의 넥서스는 그 시의적절성으로 꽤 읽어볼만하다. 불특정다수가 '마음에 들어요'를 남긴 불량식품같은 문단들도 꾸준하게 발행했다. 그러는동안 정성껏 꾸며둔 나의 은유같은 책장에는 먼지가 쌓였고, 빈자리에는 고전 대신 급히 자리를 찾아야했던 잡동사니 몇개가 나동그라졌다. 당시에도 꽤나 사치라고 생각했던, 서재와 퍽 잘어울리는 고급 디퓨저는 어느덧 끈적한 잔여물만 밑바닥에 타르처럼 엉겨 그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시간이 한치도 없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책읽기와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는 한정된 시간에는 대신 외국어를 머리에 집어넣으려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새로운 언어들을 바쁜 생활 하에 급히 배운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 결과는 거실 책상에 생긴 한폭의 정물화였다. 핵심 소재는 생필품 몇개, 기초한자를 여러번 휘갈긴 리갈패드, 못다읽은 페이지에서 뒤집힌채 세모꼴로 방치된 제로투원 원서이다. 이미 한국어로 속독한 뒤 지나치게 기본서라 생각하여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책이기도 하다.

외부의 강한 충격에 의한 균형의 붕괴는 드물다. 오히려 자만과 방치, 관성 하에 서서히 마모되어 가장 미세한 부분부터 제기능을 잃어갈 때 대부분의 붕괴가 시작된다. 인식적 충만함을 의식적으로 되새기지 않고, 그저 온전히 스스로 설계한 시험대의 시련이라는 이유로 모든것을 감내했다. 아니, 외면했다. 감내와 외면이 양날이 되는 순간을 아는가. 복잡계에서 발생하는 초월적인 불확실성을 현실적인 고통감내로 해소하려는 접근이 이에 해당한다. 과잉책임. 두달 전 눈빛에 그늘이 늘어가던 나에게 공동창업자가 말해준 단어이다. 이제야 그 의미를 더 잘 알 거 같다.

회복은 명확한 인지에서 시작한다. 개운하지 못한 아침, 필요이상으로 늘어지는 준비, 자극적인 음식으로 빠르게 때우는 끼니. 아무생각도 아무표정도없이 몇십분을 내리 숏폼으로 날리고 주변을 돌보지 못한다. 나의 살림공간을 소중히하지않고 가까운 사람에게 무심해진다. 사사로운 소통이 귀찮아진다. 땀흘리는 운동이 꺼려지고 첫문장에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미룬다. 한계까지 사고하지 않는다. 따져들지않는다. 타협한다. 무마한다. 시간을 소모한다. 이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은 해소되지않고 쌓여 더없이 일반적인 하루를 구성하고, 어느새 비가역적인 기간으로 정의된다. 한번 잘못물린 톱니바퀴는 무의식중에 주변을 수차례 마모하여 서서히 붕괴의 초석 -의도하지 않았던 이 역설적 표현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을 만드는 것이다.

시대를 사는 창업가의 삶에는 분명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스타트업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사음절로 포장되어 생각보다 긴 역사를 지니게 된 이 행위는, 괴짜 상인들이 행하는 일종의 첨단 기예이다. '무언가'를 서서히 좀먹는 일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정의하자니 난이도가 높다. 덕, 품성, 인간성, 사람다움, 영혼력.. 모두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하나 확실한건 인문학도를 무진장 괴롭게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표현력의 한계보다는 아직 선명히 깨닫지 못하여서일 확률이 높다. 와중에 원인은 알고있다.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놓이기 때문이다. 생존본능보다 인위의 목표를 우선한다. 매슬로우의 5단계를 초월한 욕망이 나머지에 자발적 결핍을 만들어, 역삼각형의 욕구이론을 새로 정의한다. 효용의 최적을 추구하지만 순전히 비합리적이며,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이다. 지나치게 희생하지만 숭고하지 않고, 하루에도 몇번씩 오만방자와 겸양지덕을 오간다.

동일한 이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소실과 침전에 이정도의 가중과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건재하다. 나의 못견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허세, 맞지않는 감성, 일장연설, 우스개, 곤란함, 특이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있다. 이를 인지하는 일은 존재를 더욱 고독하게 하고, 가져본적없는 막연한 공명자를 답없이 그리워하게 된다는 결론까지 마찬가지다. 이미 어린날에 수도없이 체감하고 골몰하여 이해하고 납득한, 남루한 깨달음이다.

그러니 침전하지 않는다. 상념에서 부유하는 시점을 적절히 종료하고, 변화를 촉구할 줄 안다. 다만 자신은 나약하기에 인지만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계기와 상황,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계기와 상황에는 행운의 요소가 포함된다. 나에게는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우연히 연이 닿아, 멀리멀리 돌아가는 삶을 살아내면서도 드물게 의식적으로 만나는 후배가 한명 있다. 행운은 불시이다. 오랜만에 잘지내는지 궁금하다는 연락에 엉망이라고 답할수는 없었다. 잠못이루는 도시의 삶을 위해 선물받은 책에 대해, 감상은 커녕 완독도 못하고 만날수는 더더욱이 없었다. 그는 나를 진정한 정신적 멘토로 여긴다. 따뜻한 문장들로 숱한 감사를 표현한다. 허나 나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회복하게 만드는 행운이 된다는걸 본인은 아는지. 어린 당신은 홀든 콜필드의 환생인 거 같다가도, 삶과 연인을 사랑해내는 태도에서 말년의 톨스토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다음은 방법이다. 삶에대한 닻이 약해진 뒤 명확한 변화의 계기를 인지했을 때, 나는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리스트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감마저 붙는다. 마치 필요한 마법을 언제든 부릴 수 있는 만능 주문서를 보유한 행운자가 된것만같다. 자취방의 먀살 액톤2를 연결한다. 쇼팽 발라드 4번, 왈츠 7번, 아니면 베토벤 소나타도 좋다. 차이코프스키 사계, 헨델 미뉴에트도 환영이다. 라흐마니노프는 가장 좋아하지만 이 의식에서는 배제된다. 아라베스크는 좋은데 달빛은 다음에 듣고싶다. 녹턴이나 바흐의 푸가는 개인의 취향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그들은 알까. 모를 수 없겠지. 세기가 지나고도 인간에게 이토록 치유의 힘을 준다는 것을. 불을 끄고 레드와인이나 피트위스키를 한잔 마신다. 안주없이 먹기 좋은-이라는 해괴한 수식어를 통과한 바틀들이기에 성능은 확실하다. 모바일로 요가 클래스를 미리 예약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게 중요하다. 요가는 깊은 이완과 명상을 포함하기에 매일 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책장 아래에 숨겨둔 종이 뭉치들을 꺼낸다. 윤의 일상, 하현의 폭염, 승현의 편지를 읽는다. 마지막에는 윤의 변곡을 꺼내 아무 페이지를 펼쳐 몇 문장을 읽는다.

다음으로는 글쓰기를 수행한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며 글쓰기에 왈가왈부가 많지만, 결과와 수행은 다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행위로써의 글쓰기이다. 한계까지 사고하고 비물질의 카오스를 언어로 정제하여 통시적으로 표현해내는 즐거움을 아는가. 내면을 선명히 들여다보고 이를 가장 명징히 정의하여 타인에게 최대한 퇴색없이 전달가능한 단어를 모래밭에서 골라내는 것. 촘촘함을 넘어 유체와 같은 표현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중용을 채택하여 활자로 빚어내는 일. 기계의 첨언도, 첨삭도 없이 직접 완성해내는 고된 창조의 즐거움. 글은 의도만 전달되면 된다고, 그런 말을 듣거든 나는 굳이 같은 의도를 지나치게 함축하거나 필요이상으로 만연해본 뒤 가장 맘에드는 내 문장을 고르곤 한다. 글쓰기를 오래 해보자니 참불이나 의도, 가타부타는 참으로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순수한 유희의 영역이다.

이번 글의 마지막 문단이다. 즉, 회복의 방법론이 끝이났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마치 미간에 밝은 빛을 쐬어 온 몸을 빛나게 만들듯 괜찮아진다. 다만 혹여 이 글을 면면히 읽어낸 자라면, 주저말고 당신만의 문장을 보내주길. 아닌 거 같아도 늘 영혼과 문학으로 통할 수 있는 대화를 그리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니 말이다.